왜 실연이 그렇게도 괴로운것일까?
이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도, 사람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변하는 법.
나의 사랑만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나,
상대방의 나를 향한 마음만은 언제나 한결같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나의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고, 사람의 마음이나 사랑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면
지루하고 답답해서 오히려 사는 재미가 덜할는지도 모른다.
최근 모교수의 글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봄이 좋다 하여도 일년 내내 봄만 있으면 좋지도 않을 것이며,
만일 우리가 항상 젊다거나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오히려 젊음이 지겨워지고 사는 것이 고마운 줄 전혀 모를 것이라고 하였다.
늙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청춘이 아름답고
살아 있다는 것이 축복이지 않겠는가?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일매일 끊임없는
상처의 연속이라 할 수도 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가족 중 누구 한 사람의 말이,
버스나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사람의 행동이,
학교나 직장에서 동료의 말 한마디가,
혹은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구의 표정이 우리의 마음에
때로는 남모르게, 때로는 요란하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같은 자극에 비교적 무감각하여 상처를 덜 입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매우 예민하여 작은 자극에도 큰 상처를 입을 때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같은 상처를 또 입을까 봐(그런 자극을 또 받을까 봐)
불안에 떠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크게 상처를 받은 나머지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게 상처를 주는 일이 없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으련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자극을 받아도
상처를 덜 입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상처를 이겨내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 반면에
어떤 사람들의 방법은 비효율적이어서 남보다 더 고생한다.
심리학자들은 오늘도 그렇게 상처받고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사람의 심리적 고통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신체적 고통까지도
이겨내는 데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고 있는 최근의 한 가지 방법은
인지-행동적 요법(cognitive-behavioral therapy)이다.
그 요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감정 반응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실연의 아픔이 두려워,
혹은 실연 당할까 봐 겁이 나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고 숨긴 나머지,
이루어질 사랑이 낙동강 오리알 격이 되고 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 시절 그 추억이 또다시 온다 해도 사랑만은 않겠어요" 라는
노랫말이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아픔을, 실연의 괴로움을 안 겪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면 된다.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하듯 사랑은 아픔을 전제로 한다.
헤어져도 아프고, 헤어지지 않아도 아프다.
그것이 두려운 사람은 평생 사랑 같은 걸랑은 하지 말고,
아무와도 인연을 맺지 않는 인생을 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그 아픔도 행복이었음을 어찌 알 수 있었을까!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으로,
그 고통이 너무 심하여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거나
일상적인 기능을 못하게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상태를 방지하고 치유하는 한 가지 효과적인 방법이,
주어진 상황에 대한 해석(혹은 설명, 생각하는 방법)을 달리 함으로써
마음속에 생기는 감정 반응(고통)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다시 말하여, 부정적인 감정에서 긍정적인 감정으로,
대단히 고통스런 기분에서 견딜 만하게 덜 고통스런 기분으로 바꾸는 일이다.
실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의 사랑을 상대방이 받아 주지 않음으로써
불행감과 더불어 당신의 자긍심과 체면에 손상을 주고,
때로는 사회적으로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불행한 사건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당신을 당연히 우울하게 만들게 되는가?
당신은 그 일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행감에 깊이 빠지고 자책하며,
미래에 대하여 절망적으로 느끼고,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가?
당신의 모든 존재 가치가 그(녀)의 사랑에 의하여 결정되는가?
당신은 완전한 실패자인가?
그 모든 일이 당신이 못났기 때문이고,
그것으로 보아 당신은 어느 한 가지도 잘하는 일이 없는,
어느 한 곳도 잘난 데가 없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해석 혹은 감정 반응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당신의 결론에 있다.
다른 해석, 다른 결론, 그리고 다른 감정 반응은 있을 수 없는가?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가 과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가?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근거를
논리성이나 합리성의 견지에서 분석해 보면,
대부분 거기에는 사고의 왜곡이나 소위 비합리적 사고가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들 때문에 사람들은 자긍심에 상처를 입고 우울한 기분에 빠지게 되며
사람과 가까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많은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대표적인 사고 왜곡 몇 가지를 알아보자.
실연의 고통과 왜곡된 사고
1. 과잉 일반화(overgeneralization)를 들 수 있다.
우리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는 말이 있듯이,
어느 한 여자에게 거절당하고 상처받은 남자가
앞으로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자기를 거절할 것만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되는 현상이다.
어떤 여자라도 자기를 좋아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 같고,
앞으로 누구에게 사랑을 청하더라도 모두 거절당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며,
그리하여 자기는 영원히 고독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사실과 다르며, 왜곡된 사고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의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며,
아름다움이나 남자다움과 같은 심미적 혹은 기호의 기준 역시
'제 눈에 안경'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그 여자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서 거절했지만,
다음 번에 다른 여자는 당신을 너무나 좋아하는 나머지
도대체 이런 남자를 세상 여자들이
여태껏 왜 그냥 두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할는지도 모른다.
우람하고 근육질인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싫어하는 여자도 있고,
뚱뚱하고 큰 여자가 아니면 장가들지 않겠다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그런 여자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는 남자도 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남자나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과잉 일반화를 잘하게 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의 성격 특성에 관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떤 한 가지 이유로 자기를 안 좋다고 하면
마치 자기에게는 좋은 점이란 한가지도 없는 것처럼,
자기는 모든 측면에서 다 나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머리가 다소 덜 좋은 사람이 성격은 좋은 경우가 있고,
성격이 좀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사람이 예술적인 소질은 뛰어나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실패하거나 거절을 당하면
마치 자신의 모든 특성이, 혹은 자기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나쁘기라도 한 것처럼 실의에 빠지며,
자기는 영원히 누구에게서도 사랑을 못 받을 것처럼 생각한다.
이 세상에 본질적으로 혹은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누구나 그의 마음속 깊이에는 진실과 선(善)이 자리 잡고 있다.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은 조물주가 처음부터 창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창조되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존재의 이유가 되며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혼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모름지기 거절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어느 정도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
사랑을 잘할 수 있으려면 사랑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 사랑의 실패를 모든 사랑의 실패로 생각한다거나
자기 인생 전부의 실패로 생각할 때,
그는 비합리적 사고에 빠져 있는 사람이며
결과적으로 우울증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과거에 자살할 목적으로 수면제 다량을 먹고
응급실에 입원한 이십 대 여자를 면담한 적이 있다.
그녀는 어느 지방 도시에서 미장원을 경영하며
혼자 살다가 어떤 젊은 남자와 사랑을 맺고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젊은 부인이 아기를 업고 나타나서,
자기는 당신이 동거하고 있는 남자의 아내이며,
이 아기는 그의 아들이라고 했다.
이 여자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고 앞이 캄캄하여,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참 뒤에 깨어나 정신을 차렸을 때도 역시 그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녀는 그날로 혼자 상경하여 정처 없이 방황하다가,
자살을 결심하고 수면제를 다량 먹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녀의 죽음을 원치 않아
그녀를 병원 응급실로 데려오게 했다.
내가 응급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아직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반의식 상태에 있었다.
그 상태에서 그녀는 한마디 말만을 반복해서 외쳐 댔는데,
그것은 "사랑은 하나다"라는 말이었다.
나중에 완전히 의식을 회복했을 때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자기에게 사랑은 오직 한 번뿐이며
앞으로 자기 인생에서 또 다른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마치 안나 카레리나의 사랑과도 같았다.
사랑은 생명과 같이 일회적인 것이고,
사랑의 실패는 전체 인생의 실패인가?
사랑의 심리학적 견지에서 볼 때 그렇지는 않다.
동일한 색깔의 사랑은 일회적일지 모르나,
사랑은 여러 색깔로,
그리고 때로는 여러 형태로 반복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위성의 문제가 아니라 현상적인 문제일 뿐이다.
사랑의 다양성과 반복성이 오히려 성격의 성숙도와 정비례할 수도 있으며,
그것은 환경적 및 시대적 요소 등과 함께 고려해 보아야 할 일이다.
2. 실연의 아픔을 가져오는 두 번째 사고 왜곡은
자기 비난 혹은 '모두 내 탓이오'라는 사고 방식(personalization)이다.
'내가 좀 더 잘났더라면', 혹은 '내가 좀 더 적극적이었더라면' 등,
어떤 이유로든 사랑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모두 자기 탓이고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자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랑이란 두 사람이 함께 이루는 것이며,
그것의 성공이나 실패의 책임은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 공통으로 있다.
그런데 그 책임이 당신에게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기 중심적 태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과대 망상적 사고라 할 수 있고 비현실적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전적으로 당신의 책임 하에만 있었다고 한다면,
상대방은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상대방은 당신 자아의 연장에 불과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자아나 독특성을 갖고 있지 않는 존재였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당신을 거부한 데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신의 용모, 나이, 가문 혹은 출신 지역 같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그건 당신의 책임에 속하는 것들이 아니다.
나는 가끔 혼자 생각으로 얼굴이 미인이라고 뽐내려 하는 사람들에게
그게 뭐 당신 때문이냐고 말해 주고 싶을 때가 있다.
부모가 그렇게 낳아 주고 길러 준 결과이지, 그 사람의 노력의 결과는 아니지 않는가?
외모가 못났다면 그것이 왜 당신의 책임인가?
혹은 상대방이 당신을 거부한 이유가 친밀감에 대한 공포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들 중에는 너무 가까워지면 그와 정비례로 불안해지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이지 결코 당신의 문제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정도 이상으로,
특히 이성간에 가까워지는 것에 대하여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매우 많다.
그런 경우에 대부분 그 사람들은 어떤 구실이든 찾아내어
거부하는 이유를 상대방에게 돌리며,
마치 상대방의 결점 때문에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처럼 말한다.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솔직해지기에는 너무 불안하고,
솔직해졌을 때 나타나게 될 결과가 너무 두려운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병(病) 비슷한 현상이다.
혹은, 상대방이 당신을 거부한 이유가 당신의 어떤 결점 때문이 아니고
단순히 당신보다 더 좋은 다른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신도 좋기는 한데 새로 나타난 사람이 당신보다 조금 더 좋은 것이다.
이것도 당신이 못난 때문인가?
당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 되기 전에는
이와 같은 상황을 막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도 당신 자신에게 못난 책임을 꼭 따지겠다면(자책하겠다면)
그때는 심리학자를 만나 상담을 받아 보는 도리밖에 없다.
무조건 자신을 비하하고 자책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잘못 되어 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그 원인 중에서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구별하고, 고칠 수 있는 것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하고,
고칠 수 없는 것은 지그시 감수하는 마음 자세를 터득하는 일이다.
여기서 사고 왜곡적 자책과 현실적 문제 해결 행동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현실적 문제 해결 행동이란 무엇이 문제인가 확인하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가지 대안적 방법을 생각해 내고,
그것들의 가능성 정도와 장·단점을 평가하고,
끝으로 그 중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선택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결점이 드러나면 인정하면서도
그로 인하여 자긍심의 손상은 초래하지 않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변화와 성장을 도모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는 어떻게 서로 다른가?
첫째로, 사고 왜곡적 자책을 하는 사람은 무조건 관계가 잘못된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내면적 결점 때문이라고만 생각한다.
반면에, 현실적 문제 해결을 하는 사람은 그 원인이 쌍방에 있으며
갈등을 초래한 과정에서 각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둘째로, 사고 왜곡적 자책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거부 행위를
자신에게 과잉 일반화하여, 자신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우울해 하고 절망한다.
반면에, 현실적 문제 해결을 하는 사람은 문제의 영역을 한정적으로 생각하며,
상대방의 거부 행위를 가지고 자기의 전부를 평가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단점을 감정이나 행위상에서의 어떤 문제점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자긍심의 문제로까지 확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것을 통하여 그는 앞으로 보다
건설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셋째로, 사고 왜곡적 자책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거부 행위를 영구적이고
교정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앞으로도 보다
좋은 결과가 생길 희망은 없으며 자기의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 문제 해결을 하는 사람은 이번에 생긴 문제는 일시적인 것이며
고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문제의 발생을 앞으로 보다 나은 관계 형성
을 할 수 있게 하는 성장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일한 이성 관계의 실패에 대하여 그것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태도)이 사람에 따라 대단히 다름을 볼 수 있다.
사고 왜곡적 자책을 잘하는 사람은 우울증적 소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사람은 마음의 평화가 쉽게 손상 받을 수 있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어떤 잘못된 일에 대한 그 사람의 부정적 해결 방식
(즉, 자기 자신의 성격적 결함 때문이며, 전반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영속적이라는)이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의 정신과 교수인 애론 백(Aaron Beck)이 말하는
"우울증을 일으키는 사고방식"이다.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은 사고방식을 현실적 문제 해결을 하는 사람의
방법으로 고치는 것이다.
즉, 잘못된 일의 책임이 나 자신보다 외부 환경 혹은 타인에게 있으며,
문제의 영역이 전반적이 아니고 한정적이며, 그것은 영속적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핵심적인 것은, 실패를 통하여 어떤 교훈을 배우겠다는 태도이다.
기실, 이 세상에는 공짜란 단 한가지도 없으며,
대가 없이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배우고 또 배우는데 그때마다 적지 않은 수업료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이 때로는 현금일 수도 있고 때로는 체면의 손상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가슴의 상처일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신체적으로 얻어맞은 후에 정신이 들기도 한다.
사랑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사랑의 파탄을 통해서 우리는 매우 귀중한 교훈을 얻기도 한다.
그렇다면 본전은 건진 것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실패했을 때 비합리적으로 자신을 책망하고 자기의 가치를 깎아 내리며
자긍심에 상처를 주기보다는, 문제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실패를 통하여 내가 무엇을 배웠는가를 챙기는 일이다.
그래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거든 다시 한 번 배운 교훈이 무엇인가를 정리해 보고,
그것을 가지고 철모르는 가슴을 잘 달래어 본다.
3. 사랑의 실패에서 흔히 나타나는 세 번째 사고 왜곡은
이분적 사고(二分法的 思考, all-or -nothing thinking, dichotomous thinking)로서,
흑백 논리라고도 하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하고 헤어지게 되었을 때 그 관계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하거나,
그 관계(연애)는 '실패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와 같은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서,
실제로 세상에 실패한 관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이 서로 충분히 잘 맞지 않음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잘 맞는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한 번 생각해 보자.
그 기준에는 성적(性的) 만족도, 자기 마음을 열어 보이는 솔직성, 같은 취미,
신뢰감, 충실함, 상호 존중심, 정직성, 함께 웃고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 능력,
농담을 이해하는 능력,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것들을 각각 0점에서 10점에 이르는 범위로 평정해 보라.
그러면 어떤 것은 높은 점수가 나오고 어떤 것은 낮은 점수가 나오게 될텐데,
그래도 대부분 중간 이상의 점수를 받을 것이다. 다시 말하여,
공통점이 낮은 경우도 있지만 서로 잘 맞는 점이 더 많을 경우가 많다.
이렇게 평가해 본다면 어떤 관계도 '완전히 실패'라거나 '완전히 성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분법적 사고를 하게 되면 감정 반응 역시 극단적으로 되기가 쉽다.
상대방을 너무 좋아(理想化)하거나, 극단적으로 미워하고 싫어하게 되며,
중용을 모르게 된다. 누군가 사랑은 햇볕과 같다고 한 것이 있다.
햇볕이 너무 뜨거우면 살갗이 데어 버리듯이,
사랑도 너무 뜨거우면 상대방이 견디지 못한다.
그것까지는 그래도 덜 해롭다. 만일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나 싫어하는 감정이
극도에 달하게 되면 그때는 파괴적인 행동이 나타날 수 있고 살인도 저지를 수 있다.
이분법적 사고란 상대가 우군이 아니면 적군이 되라는 단순한 논리이므로
어제의 애인이 오늘은 원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제까지 무척 다정하던 사람이 오늘은 상대를 잔인하게 해치는 행위도
서슴없이 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격의 미성숙이며 감정 조절의 부적절성으로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는 완전한 원수도 그리고 완전한 친구도 없는 것이다.
하물며 완전한 애인이 있을 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것만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언젠가는 배반의 쓴잔을 면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흑과 백의 중간 영역에 속하는 것을 충분히(완전히가 아님)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성격적으로 성숙된 사람의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성격적 성숙이란 현실을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며 즐길 줄 아는 심리적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이상(理想)을 갖되 현실이 그 이상에 못 미친다
해서 현실을 부정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사고의 탄력성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완전히 흰 벽이나 완전히 까만 옷감이 없듯이
(거기에는 모두 조금씩 덜 흰 부분, 덜 까만 부분이 있다),
어떤 사람(남편, 아내, 스승, 제자, 성직자, 정치가 등)도,
어떤 감정(사랑, 미움, 즐거움, 권태, 우울, 흥분 등)도, 완전한 것이란 없다.
완전치 못하다 해서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뿌리칠 때,
그렇게 했을 때 오는 마지막 결과가 무엇인지를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은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것을 없다고 보채는 것밖에 안되는 것이다.
만일 사랑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이와 같은 논리로도 마음이 달래 지지 않는다면,
그래도 화가 나고 슬퍼진다면, 그리고 아직도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면
그야말로 '그런 대로 한평생 사는 도리' 밖에 없다.
혹 그런 감정이 너무 심해져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면,
그때는 임상 심리 전문가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전문적인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다.
4. 실연의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게 하는 네 번째 사고 왜곡의 종류는
재앙화(災殃化, castastrophizing)이다.
재앙화란, 어떤 일(결과)의 부정적 측면만을 극대화하여 생각함으로써 불안감이나
우울감을 느끼는 현상이다.
사랑의 실패는 한편으로는 대단히 우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남들이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부모나 형제들이 혹은 친구들이 내가 실연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될까?
더욱이 우리 사회는 체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부부가 한 집에서 이혼 상태로 살면서도
외부에는 일체 숨기고 다정한 부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사회이다.
서양 사회에서는 이혼 같은 것이 체면상의 큰 오점이 안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때로 출세에 다소 지장을 줄 수도 있다.
연애든 결혼이든 그것의 파탄이 사회적 체면에 크게 보탬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한가지 재앙화를 초래하는 것은 사랑하는 능력에 대한 불안이다.
우리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사랑이란 선천적 소질이 아니
라 배워서 얻어지는 능력임을 알았고,
그것의 적절한 발달은 원만한 성격적 성장(성숙)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고찰한바 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연속적으로 연애 관계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혹은 결혼 생활에서까지 파탄이 생겼다면,
혹시 그것은 나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든가 본질적인 성격상의 어떤 결점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내가 성공적으로 연애나 결혼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나 혹은 자신감이다.
실연의 고통
원본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다시 읽어 보려고 퍼왔다.